국가공인자격증 취득한 노인돌봄 전문가
“수년 동안 일해도 월 200만 원도 못 벌어”
“부모 같은 어르신들…고맙다 한마디에 뭉클”
노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노인 돌봄 서비스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노인요양보호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력인 요양보호사에 대한 처우와 인식 개선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당진시대>와 <당진시재가장기요양기관연합회>가 함께 장기요양기관과 관련해 요양보호사의 처우와 장기요양기관의 현황 등에 대한 기획기사를 연재한다. 첫 기획으로 7명의 요양보호사와 함께 요양보호사의 처우에 대한 익명의 간담회를 진행했다.
요양보호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A씨
“한 8년 정도 아픈 시어머니를 돌봤어요. 돌아가신 후에 돌봄 경험이 있으니 다른 분도 돌볼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죠. 당시엔 ‘장롱면허’라서 운전도 할 줄 몰랐어요. 13년 차인 지금은 일하는 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B씨
“방문요양을 할 때는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어요.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처음엔 노인돌보미 일부터 시작했어요. 주간보호센터에 들어간 지는 한 1년 반 정도 됐네요.”
C씨
“저도 어머니를 8년 정도 돌봤어요. 2019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후에 이 일을 못 놓고 계속 하고 있습니다.”
D씨
“교회 일을 오래 했어요. 다 내려 놓고 사회에 나왔는데 나이가 있다 보니 취업할 곳이 없더라고요. 처음엔 학원차 운행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하지만 돈이 모아지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요양보호사는 나이 제한과 정년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공부를 하면서 시작하게 됐어요.”
E씨
“시어머니가 아프실 때 요양보호사가 돌봐줬어요. 그때 3시간 정도 요양보호사가 어머니를 돌봐줬는데, 너무 좋았어요. 그 시간만큼은 제 일을 할 수 있더라고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간 너무 힘들었기에 저도 쉬려고 했어요. 하지만 코로나19로 어딜 나가지 못하니 무기력해지더라고요. 그러다 몸 불편한 당숙모를 도와드리다가 전문적으로 요양보호사를 하게 됐어요.”
F씨
“저는 교직에서 오래 일하다 교장으로 퇴직했어요. 퇴직하고 할 일이 딱히 없더라고요. 아내가 먼저 노인돌봄 관련 일을 시작했어요. 아내가 노인돌봄 문제는 모두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제안해서 같이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지금은 아내와 같은 곳에서 즐겁게 근무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을 종종 마주친다고 들었어요.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C씨
“2인1조로 방문목욕 일을 할 때였어요. 방문목욕은 혼자서 씻기 어려운 어르신 가정을 찾아가 목욕을 도와드리는 일이에요. 어르신 아들에게 장애가 있었는데, 여름이면 날이 덥다고 문을 활짝 열어 놓았어요. 그러다 보니 파리가 잔뜩 들어왔고요. 어르신 목욕을 해드리려고 동료분이 다리를 올렸는데 그때 그러더라고요. “나온다. 나오네!”라고요. 욕창이 생긴 부위에서 구더기가 나오고 있는 거였어요. 더럽고 징그럽다기보다 너무 안타까웠어요. 구더기가 생살을 뚫고 나오는데 얼마나 아플까 싶었어요. 상처에 진물이 나와 바닥도 미끄러웠어요. 그 어르신은 저희가 갈 때면 ‘오실 땐 단골손님, 가실 땐 남’이라면서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곤 했죠.”
A씨
“코로나19가 한창 심할 때였어요. 어르신이 질병이 많아 예방접종을 못 하셨어요. 그러다보니 어디를 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집에 있으셔야 했죠. 그 어르신은 외식 한 번 못하셨는데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F씨
“코로나19로 인해 센터 문을 일주일 정도 닫았던 때가 있었어요. 센터에 못 오는 어르신들을 위해 도시락을 배달했어요. 그때 한 남성 어르신 집에 갔던 기억이 나요. 평소 무뚝뚝한 분이셨거든요. 그 어르신 집에 방문해 도시락을 옮겨 놓는 찰나에 어르신이 센터 가는 줄 알고 벌써 차에 타 계시더라고요. 코로나19 때문에 센터가 문을 닫았다고 도시락만 놓고 가야 한다고 하니 눈시울이 붉어지셨어요. 사람 얼굴이 이렇게 창백할 수 있구나를 그때 느꼈어요. 늘 무뚝뚝하고 정없어 보였던 어르신의 눈물을 보니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제 일에 대한 가치도 느꼈어요.”
요양보호사 정책과 관련해 달라져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B씨
“요양보호사 1명당 어르신 7명을 돌봐야 해요. 어르신의 모든 이동은 요양보호사가 도와야 하고요. 낙상 등 안전사고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늘 조마조마한 상태로 일을 해요. 어르신 7명의 상황을 다 보고 있어야 하거든요. 저희 센터에서는 어르신이 먼저 식사를 한 다음 직원들이 교대로 밥을 먹어요. 밥을 먹는 동안에도 창 너머로 어르신들을 확인해야 해요. 밥을 먹으면서도 엉덩이가 들썩거려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거든요. 요양보호사 1명당 어르신 7명은 정말 말도 안 돼요.”
F씨
“처우개선에는 제도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해요. 제도적 측면에서는 요양보호사의 급여 개선이에요. 현재 최저시급 9160원을 받고 일해요. 주 5일 내내 일하면 세후 170만 원대죠. 저희는 중간에 휴식시간이 있어도 못 쉬어요. 또 고용이 불안정할 때도 있어요. 요양보호사는 국가에서 인정한 자격증을 가지고 소명의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고용에 대한 불안정이 해소돼야 해요.”
B씨
“저희는 8시 출근, 5시 퇴근이에요. 하지만 어르신이 일찍 나오시니 저희도 일찍 출근할 수밖에 없어요. 오전 7시30분 정도에 출근해요. 그리고 5시에 끝나지만, 차로 어르신 가정까지 데려다드려야 해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어르신 집에 들어가서 옷 정리해 드리고 불도 켜 드리고, 또 보호자가 원하는 대로 안방이나 거실에 모셔다드리고 센터로 와야 일이 끝나요. 전에 유치원 다녔을 때는 제가 남편보다 월급이 더 많았어요. 근데 지금은 남편 월급의 1/3 수준이에요. 더 어처구니 없는 건 남편은 퇴근했는데 저는 퇴근을 못 했다는 거죠.”
C씨
“방문요양을 하다 보면 월급이 들쑥날숙해요. 만약에 어르신이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면 몇 달을 쉴 수밖에 없어요.”
D씨
“아직도 저희를 가사도우미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젊었을 때 마을에서 일 좀 했다는 분의 돌봄을 맡은 적이 있어요. 그 어르신은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전화로 동네 사람들 다 모았어요. 그리고 김밥을 먹쟤요. 김밥은 누가 싸요. 그 많은 김밥 다 제가 싸야죠. 어느 날은 반으로 쪼갠 배추를 잔뜩 쌓아 놓고 겉절이를 하라고 하고, 아내 밥은 진밥에 육식, 남편 밥은 된밥에 채식이라 두 번 밥을 차려야 하기도 했어요.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했더니 어르신이 센터에 전화해서 저 다음날 짤렸어요.”
E씨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할 때 실습을 위해 한 어르신 가정에 갔어요. 실습생 8명이 갔거든요. 배추를 옮기라고 하더라고요. 저희는 농사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더니 ‘이 여편네들은 뭐하러 왔냐’고 하더라고요.”
D씨
“맞아요. 저도 몇 번 주의를 줬어요. 하지만 잘 안 돼요. 어르신들도 주변 이웃에게 들어서 요양보호사에게 농사 등을 시키면 안되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시켜요. 어떻게 시키냐면 본인 스스로 반찬을 만들어 놓고 제가 할 일이 없게 하는 거죠. 그러고 남은 시간 동안 마늘을 캐라고 해요. 저희를 공공근로자처럼 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B씨
“요양보호사 처우개선만큼 어르신들에 대한 처우개선도 필요해요. 저희 센터 어르신 중 최고령이 97세에요. 보호자는 60~70대고요. 아이들은 부모들이 양육비를 내잖아요. 하지만 부모들은 젊어서 일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르신의 보호자들은 그렇지 못해요. 주간보호센터만 다니더라도 식비는 개인이 부담해야 하거든요. 아무리 저렴해도 한 달에 40만 원은 나가요. 경제력이 떨어진 60대와 70대가 본인부담금을 매달 내기 어렵죠. 그래서 방치되는 어르신도 많아요.”
그래도 이 일을 하는 이유는?
G씨
“25~30% 정도의 어르신은 치매가 있어도 혼자 살아요. 우울증이 있는 어르신도 많고요. 처음엔 표정이 어둡던 어르신들이 센터를 다니면서 점점 밝아지는 것을 볼 때 뿌듯해요. 그리고 목욕 서비스를 받고 고맙다고, 아들과 딸도 못 해주는 일을 해줘서 고맙다고 할 때 보람을 느끼죠.”
A씨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 가정에서 돌봄 일을 하다 보면 제 것을 나누고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농사 지은 것들을 가져다 드리기도 하는데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 뿌듯하죠. 그리고 이 나이에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