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시민' 주창한 유해숙·유범상 남매 "나눔·실천 노인 많아져"
"국가·지자체는 안전한 공동체 만드는 시민교육 활성화 고민해야"
편집자 주 =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가 노인층의 핵으로 진입하면서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의 노인 비율이 2018년 14.4%로 '고령 사회'에 들어선 데 이어 2025년 20.6%로 '초고령 사회'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100세 이상 역시 1990년 459명에서 2020년 5천581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수명이 점점 길어져 '고령 국가'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를 사는 노인에게 돈과 건강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젊은 층과 세대 갈등, 외로움과 고독, 가족·사회와 분리되는 소외 등을 들여다보아야 할 시점이다. 연합뉴스는 노인이 존엄성을 지키며 행복한 삶을 위해 개인과 사회, 국가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15편에 걸쳐 인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자고 한다. ①∼④편은 한국 노인의 실상과 실태를, ⑤∼⑩편은 공동체에 이바지한 노인들을, ⑪∼⑮편은 선배시민 운동과 과제 등을 싣는다.
(서울=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동네 선배나 학교 선배, 직장 선배와 달리 '선배시민'은 다소 낯설다.
남매인 유해숙·범상은 시민권(citizenship)을 권리로 인식하고 이것을 함께 나누고 실천하는 노인으로서 우리 사회에 '선배시민'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학자인 유범상(56)은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영국 에든버러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한국방송통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다.
두 살 터울의 누나 해숙은 인천복지재단 초대 대표와 인천시 사회서비스원 대표를 역임한 현장 운동가로 지금은 'PH 마중물 미디어'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어렸을 적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겠다'는 꿈을 키웠던 남매는 올해 '선배 시민학회' 창립을 주도하며 전국 노인 수만 명을 대상으로 선배 시민 교육을 확산하고 있다.
이들이 새로운 노인상으로 제시한 선배시민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어릴 때 꿈은
▲ (범상) 누나는 고아원 원장이, 저는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둘 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나는 영문학·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30대부터 현장에서 일했다. 정치와 노동정책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처음에 정치학을 공부한 저는 사회정책을 폭넓게 이해하고자 다시 사회복지학을 배웠다. 누나는 현장을, 저는 이론을 잘 알아서 소설 '태백산맥'의 손승호와 솥뚜껑처럼 서로 보완하는 동지이자 서로의 선생이다. 다른 길을 돌아 나란히 사회복지 분야에 발을 들여놓았고, 결국 어릴 적 꿈을 실현하는 중이다.
-- 우리나라 노인들의 실상은 어떤가
▲ (해숙) 한국의 많은 노인은 가난하고 아프다. 죽고 사는 문제에 직면했기에 가장 약한 존재다.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모두 1위라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들은 가난했던 시절에 돈 벌기 위해 베트남에 군인으로,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로, 중동에 근로자로 갔지만 자식 가르치고 집 장만하고 나니 손에 남은 게 없다. 국가가 하라는 대로 살았는데도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국가는 이들의 희생으로 단기간에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의 부자가 됐지만, 이들은 경제적·정신적 빈곤에 빠진 것이다.
한편으로 노인은 지혜롭고 현명해서 존경받기도 하지만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드는 '꼰대'로 취급받기도 한다. 젊은 세대와 갈등까지 생기니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도 한다.
-- 노인과 젊은 세대 간 갈등 해법은
▲ (범상) 세대 갈등은 이해나 공감 부족과 이익 충돌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나 때'의 노인들이 '너 때'의 젊은이들을 어루만지고, 젊은이들이 노인을 뒷방 늙은이 취급하지 않고 '우리는 모두 시민'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머리를 맞대면 세대 간 갈등이 확연히 줄어들 수 있다.
특히 세대 간 이익 갈등의 해소를 위해 젊은이와 노인이 시민의식을 기반으로 연대해 국가로부터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조건(빵)을 권리로써 얻어내야 한다.
노인과 청년이 서로 자기 몫을 더 챙기기 위해 싸울 것이 아니라 연대해서 교육, 의료, 돌봄 등을 국가가 해결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즉,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가 서로의 것을 빼앗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세대의 몫이 엇비슷해지는 사회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시민이며, 단지 살았던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이해와 공감이 선행돼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시민권 교육이 필요하다.
-- '선배시민론'을 주창한 선구자인데
▲ (해숙) 이런 상황 속에서 노년을 풍요롭게 보내려면 '노인이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돌보는 주체'로서 역할 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008년 '선배 시민'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빵은 동물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지만,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으며 장미(존엄)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2016년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와 함께 이를 알리는 선배시민 교육을 본격화했다. 최근엔 학회를 창립해 선배시민 교육의 이론적 체계화와 대중화를 꾀하고 있다.
-- 구체적으로 선배시민이란
▲ (해숙) 선배 시민은 시민권을 권리로 인식하고 이것을 공동체에서 이웃과 함께 나누고 실천하는 노인으로 정의할 수 있다.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가 시민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시민권 이론을 토대로 더 나은 공동체를 상상하고 변화시키고자 실천하는 노인들이 선배시민이다. 따라서 학력이나 재력, 경력, 재능 등과 상관없이 누구나 선배 시민이 될 수 있다.
-- 이미 노인을 대변하는 호칭들이 있다. 굳이 왜 '선배시민' 인가
▲ (범상) 노인은 크게 늙은이, 어르신, 액티브 시니어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돌봄이 필요하고 고집 센 늙은이, 지혜롭지만 감정과 욕구를 자제하는 어르신, 성공했지만 개인적 삶을 사는 액티브 시니어가 있다.
얼마 전 한 노인복지관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가장 싫어하는 호칭으로 '노인'과 '어르신'을 꼽았다. 새로운 형태의 노인상과 호칭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신은 물론 동료 시민, 후배 시민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공동체에 관심을 두는 선배시민은 사회에서 인정받고 노인을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호칭이 될 수 있다.
-- 선배시민이 되면 삶이 어떻게 달라지나
▲ (범상) 노인들에게 국민의 의무를 물으면 납세, 국방, 교육, 근로 등 온갖 의무가 술술 나온다. 그런데 권리에 관해 물으면 참정권(투표) 정도에 그친다. 헌법에 명시된 숱한 권리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시민으로서 권리를 요구하면 당당하게 늙어갈 수 있다. 구체적으로 크게 두 가지가 달라진다.
우선 사회적(공동체적) 협력을 통해 노후의 경제문제(빵)를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초노령연금으로 소득 결핍을 면할 수 있고, 노인에 대한 무상의료 지원으로 병원비의 부담을 지지 않고, 공동주택 제공으로 주거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 선배시민은 특히 여러모로 취약해지는 시기인 노년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를 요구한다. 이는 나중에 후배시민의 삶에 고스란히 좋은 영향을 미친다.
또 하나는 존재 의미(장미)를 찾게 된다.
은퇴자 대부분은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시며 옛날이야기를 되풀이하거나 등산 혹은 여행이나 맛 기행, 골프를 치며 보낸다. '한평생 일만 했으니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하자'며 처음 몇 년은 재밌어한다. 하지만 슬슬 지겨워지거나 무의미함과 만나는 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실존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선배시민 활동가들은 "마을에서 내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줄 몰랐다"라거나 "쓸모 있고 존경받는 존재로 인정받아 즐겁다"고들 이구동성이다.
-- 베이비부머들이 대거 은퇴하고 있다. 이들의 욕구는
▲ (해숙) 700여만 명에 달하는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가 조만간 노인층의 핵으로 진입한다. 이들은 평상의 삶에 나이만 보태졌을 뿐인데 갑자기 쓸모없는 '뒷방 늙은이'로 취급받는 것을 싫어한다. 입은 닫고 귀와 지갑을 열라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젊은이도, 아이들도 활발하게 말하는데, 왜 우리가 우리 말을 못 하나" 혹은 "왜 욕구와 욕망을 가진 나이 든 '보통 사람'으로 불러주질 않나"하며 언짢아한다. 뒤로 물러나는 것을 미덕으로, 운명으로 받아들인 현재 노인들과는 매우 다르다. 은퇴 후 개인 일에만 몰두하는 액티브 시니어에서 벗어나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선배시민으로 행동하도록 이들의 엄청난 에너지를 활용하는 방안을 찾기 위한 국가의 고민을 더는 미루면 안 된다.
-- 선배시민 교육의 확장성과 방향은
▲ (해숙) 궁극적으로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인 선배시민 교육은 이제 지역사회 안전을 넘어 기후변화나 난민, 다문화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노인만을 대상으로 했던 교육은 사회복지사, 관련 기관장으로 확대됐으며 기업 은퇴자 모임이나 재한중국 교포 문인단체, 노동단체 등에서도 교육 요청이 올 정도로 대상도 넓어지고 있다. 시민교육은 노인뿐 아니라 아동, 청소년, 장애인 등 전국 6만여 개의 각종 사회복지시설의 다양한 계층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국가나 지자체의 책임과 역할은
▲(범상) '이태원 참사'로 또 많은 젊은이가 희생됐다. 이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지 못한 국가의 책임이 크다. 국가가 안전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시민으로서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안전에 대한 국가의 무한 책임이 있듯 시민은 안전한 사회를 요구할 무한의 권리가 있는 것이다. 후배시민과 함께 하는 선배시민 교육은 국가의 의무를 감시하면서 개인과 사회의 권리 향상에 이바지할 수 있다.
이와 별도로 교육부와 보건복지부 등 정부의 각 부처와 지자체는 시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유아 때부터 평생 지원해야 한다. 전국 곳곳의 노인복지관 등 각종 시설을 '시민교육센터'로 전환해 이를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