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희귀병을 앓는 두 아이가 이사 온 집. 뭔가 이상하다.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가구 위치가 바뀐다. 마치 자신들이 아닌 누군가 살고 있는 양. 처음에는 누가 집에 침입한 줄 알았다. 나중에는 그들이 귀신이라 여겼다. 알고 보니 그들은 죽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유령은 바로 자기 가족들. 그렇게 자신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이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동거에 들어간다. 20년 전 개봉한 영화 ‘디 아더스’의 줄거리다.
영화에서 유령들은 자신의 존재를 알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오히려 ‘없어야 하는’ 또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로 떠돌아 다닌다. ‘수원 세 모녀’나 ‘서울 신림동 반지하 모녀’ 모두 비극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곳에 사는 존재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햇빛이 제대로 안 들고 곰팡이가 피어나는 지하에 살 수밖에 없는 처지를 알 리 없는 지방자치단체장이 ‘반지하를 없애겠다’고 주장한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노인 문제도 다를 바 없다. 얼마 전 통계청은 장래인구 추계를 통해 50년 뒤에는 인구 절반이 노인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우리의 고령화 속도가 세계 최고라는 지적도 함께. 하루 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고령자들에 대한 부양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인 기준을 장기적으로 74세까지 올리자는 의견을 내놓았다.여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노인은 사회에 부담이 되는 존재, 일은 하지 않고 청년들에게 얹혀 사는 쓸모없는 이들이라는 의식이다.
고령화 대책의 출발점은 노인이 아니라 저출산 극복이었다. 노인복지 정책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2004년 보건복지부 등 6개 부처 공동 태스크포스(TF)의 명칭도 ‘인구고령사회대책팀’이었다. 초점 역시 생산가능인구의 감소와 부양 부담 증가.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노인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하는지 알지도 알려고도 않는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올 7월 기준 약 901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17.5%에 달한다. 1970년에 3.1%에 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50년 새 6배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 노인 부양비도 24.5명에 이른다. 생산가능인구 1명당 0.24명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미다. 노인에 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밀리고 모든 초점을 저출산 해소, 생산가능인구 회복에 맞추는 이유다.
노인은 우리 사회의 짐일 뿐일까. 정말 유령처럼 필요 없는 존재일까. 우리나라의 맞벌이는 2020년 현재 449만 가구, 비율로는 45.4%에 달한다. 거의 절반이 부부가 같이 직업 전선에 나선다는 얘기다. 이 중 보육 시설이 있는 직장에 다니는 부부는 30~31% 정도. 결국 310만 쌍의 부부가 공공 또는 사설 보육 시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18세까지 3억 원가량 드는 양육 비용을 이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결국 아이들은 할아버지·할머니에게 맡겨진다. 이들마저 없다면 가뜩이나 깊은 저출산의 골이 더 깊어질지도 모른다.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처럼 사회 곳곳에 널려 있을 수 있다. 단지 우리가 찾지 못할 뿐이다.
고령 사회 대책은 노인들에 대한 부양 부담을 줄이는 것이 출발점이 돼서는 안 된다. 고령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고령 사회가 생산가능인구를 줄이기는 하지만 노인들을 사회와 경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노인 정책과 고령 사회 대책의 핵심은 어르신들이다.
장애인이나 소외 계층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 달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자폐·농아·시각 장애인이 살아가고 반지하 거주자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하소연이다. 노인도 마찬가지다. 고령자는 유령이 아니다. 청년 문제의 원인도, 부양 부담의 원인 제공자도 아니다. 당당히 존재하는 사회 구성원의 일부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향할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