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누구나 한번은 환승해야 할 때와 마주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직장이나 일터에서 퇴직해야 하죠. 나이와 상관없이 젊어서도 새로운 일, 새로운 세계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한번 실패한 뒤 다시 환승역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요. 인생 환승을 통해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생한 경험을 함께 나눕니다. <편집자>
나는 대학 2학년 학생이었던 1978년 여름 아내와 결혼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40년을 의좋게 같이 살고 있다. 아내는 내 여동생 친구였는데 나를 처음 본 날 자기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사귀거나 데이트도 안 하겠다고 해서 선친의 허락을 얻어 바로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9년 겨울, 1년 반을 떨어져 지내다 아내와 한 살 난 아들을 서울 성북구 이문동 학교 근처 월세방으로 데려왔다. 나는 가족과 떨어져 살기가 정말 힘들었고, 죽기보다 싫었다. 학비는 부모님에게서 지원을 받았으나 생활비 때문에 학원 영어 강사를 하며 겨우 버티다가 4학년이 되자마자 무역회사에 취업했다. 가족을 위해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으며 81년 초여름 딸도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나 무역회사에서 일은 쉽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모든 역경을 참으려고 했지만 근거 없이 나와 내 가족을 무시하고 일부러 비난하며 나무라는 직장 상급자의 횡포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 한국통신 공채 모집 공고를 신문에서 얼핏 보게 됐다. 아내에게 훌쩍거리며 이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며 부탁했고 아내는 나 대신 이문동 시장에 장사를 나갔다. 나는 두 아이를 돌보면서 반년 동안 미친 듯이 공부했다. 덕분에 우수한 성적으로 한국통신에 합격했다. 그때 한국통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공사 중 한 곳이었다. 나는 한국통신 연수원 국제훈련학부 팀장으로 성실히 근무하면서 회사에서 보내준 미국 랭귀지 스쿨을 수료했다. 중국 베이징 이공대 어학연수를 또한 좋은 성적으로 수료하고 회사에서 파견하는 싱가포르 텔레콤 교환교수로 얼마 동안 근무하기도 했다.
1997년 중국 베이징 이공대 어학연수 당시 아내가 너무 보고 싶어 베이징으로 오라고 해 일주일을 같이 있었다. 베이징 곳곳을 아내와 함께 여행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진 박길수]
한국통신 연수원 근무는 정말 행복했다. 나는 외국 어학연수를 하면서 지급되는 체재비도 알뜰히 아껴 내 사랑하고 고생하는 아내에게 보내줬다. 내 아내는 이제 매달 나오는 급여와 내가 보내온 체재비까지 한꺼번에 받을 수 있었다. 아내는 모처럼 먹을 것도 실컷 먹고, 입고 싶은 옷도 거의 사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온 세월을 잊을 수 없었던 듯싶다. 남편이 벌어온 돈을 아무렇게나 쓸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 푼 한 푼 돈을 모았고 자신도 우유와 김밥 노점상을 시작하면서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주상복합 아파트와 상가를 사들인 것이다. 아내는 그 집을 사기 전에 나와 상의하지 않았고 사고 나서 보고하는 것처럼 나에게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아내는 먼저 상의하면 내가 못 사게 할 줄 알았던지라 자기 명의로 사고 나서 말한 것이다. 아,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별수 없이 나는 대출을 받아야 했다. 그러다 IMF 이후 마침내 통신환경의 변화로 2003년 한국통신에서 명예퇴직하게 됐다. 꽤 많은 명퇴금을 받았다. 그리고 아내가 하는 우유와 김밥 노점 장사를 같이하다 조그만 김밥가게를 열었다. 우리 부부는 대전 대덕구 신성동 연구단지 먹자골목에 작은 김밥집을 냈고 그곳을 우리 노년의 놀이터로 삼아 놀면서 장사했다. 두 아이는 이미 다 결혼을 했으므로 우리 둘이 행복할 일만 남은 것이다. 차근차근 주변 정리도 하면서, 만족스럽고 참으로 희망찬 나날이었다. 2015년 5월 1일 까지는 그랬다. 그날 자정을 넘어 세면장에 들어간 아내가 갑자기 쓰러졌다.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졌다.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 일어났다. 수술을 세 차례 받았다. 뇌 동맥 두 곳의 지주막하 출혈로 아내는 혼수상태였다. 아내는 통증 감각만 조금 있었고, 다른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병원에 있던 아내를 3년 2개월 만에 집으로 데려왔다.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재활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박길수]
그해 잔인한 5월은 병원마다 메르스 공포로 숨쉬기조차 두려웠다. 아내가 응급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요양보호사 학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해 11월 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아내의 요양보호사가 됐다. 그리고 바로 아내를 일반병실로 데려와 24시간 아내 옆에 붙어있었다. 나는 아내가 먹는 약을 학습했고, 아내에게 무슨 재활운동을 하는지 배웠다. 마침내 아내를 집으로 다시 데려왔다. 나는 치료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므로 다시 장애인 도우미 자격증도 땄다. 오후 시간 돈을 벌러 나갈 때 딸이 아내를 간호한다. 천사 같은 딸과 말 없고 듬직한 내 사위가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맙다. 나는 아내가 의식은 없지만,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감기나 폐렴만 조심하면 된다고도 알았다. 아내는 그 어두운 지옥에서 다시 살아 돌아왔고 나는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은 아내와 일하는 오후 시간만 제외하고 온종일 함께 있다. 아내의 전문 요양보호사로, 그리고 믿음직한 남편으로 항상 아내 곁에 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기도를 늘 드리고 있다. 이제 우리 부부는 더 건강히 사랑하며 오래오래 살다가 비슷한 시기에 같이 이승을 떠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