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시내 한 노인복지센터 문화교실에서 노인들이 댄스공연을 하고 있다. 문화일보 자료사진
“내 생활 버거워 부모 못모셔 자식에게도 짐 되지 않을 것” 전통적인 인식 크게 바뀌어
나이들며 자신의 삶 즐기고 부모·자식간 관계 리모델링 본인들만의 ‘생존전략’ 설계
국내 한 대기업에서 30년 가까이 일하다 최근 퇴직한 A(57) 씨는 일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구직 활동에 나섰다. 사무직으로 별다른 기술 없이 회사에 다닌 A 씨는 급한 대로 자신이 몸 담았던 관련 업계 중소기업을 상대로 조언을 해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A 씨는 자문활동을 하는 틈틈이 공인중개사 자격 시험을 준비하는 등 향후 안정적으로 노후를 이어갈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회사로부터 퇴직금을 받았지만 2년 전 딸의 결혼 자금으로 쓰기 위해 빌렸던 돈을 갚고, 아직 미혼인 아들에게 보태 줄 돈을 생각하면 A 씨의 주머니 사정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짊어진 ‘직장’이란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또다시 이력서를 손에 쥔 A 씨는 그러나 “자식들에게 어떤 부담도 주고 싶지 않다”면서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노후는 스스로 책임지겠다”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A 씨는 “나이가 들어 자리를 잡는 게 쉽지 않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고 싶다”면서 “당장 자기 밥벌이도 힘든 아이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양원에 노모를 모신 A 씨는 “애들 결혼과 앞으로 먹고살 걱정을 하다 보니 정작 어머니를 잘 챙기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면서 “자식과 노모 사이에서 내 노후까지 챙겨야 하는 게 버거운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온 오모(59) 씨는 5년 전 남편이 퇴직한 이후부터 충북 청주에서 버섯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생애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농사일을 황혼이 다 돼 시작한 오 씨 부부지만 이들은 오히려 퇴직 전보다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오 씨는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농장에서 남편과 함께 노후를 준비하면서 자유롭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면서 “스스로 노후를 계획하면서 오히려 아이들과 적당한 거리가 생겼고 각자의 삶을 즐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오 씨가 노후를 스스로 계획하기 시작한 건 평생을 자식에게 바친 ‘전형적인 한국 부모’들이 노후에 외로움에 시달리는 모습을 목격한 후부터다. 오 씨는 “병원 봉사활동을 하면서, 모든 것을 퍼 주고도 노후에 자식들에게 외면받으며 외롭게 사는 어르신들을 여럿 봤다”면서 “자식이 부모를 부양한다는 전통적인 사고관은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오 씨는 “젊은 세대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면서 부모를 부양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어렵게 됐다”면서 “경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각자의 삶을 즐기기 위해 노후는 스스로 설계하고 준비하는 게 바람직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자식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직장을 떠난 50대들이 다시 일터로 나서고 있다. ‘노부모는 자식이 책임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부양관도 바뀌는 모양새다.
30일 문화일보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50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녀의 노부모 부양 책임에 대한 태도’를 묻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71.0%는 ‘부모 스스로 알아서 준비해야 한다’고 응답해 전통적인 부양관에 큰 변화를 보였다.
반면 ‘자식들이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부양관을 가진 50대는 손에 꼽혔다. ‘자녀와 비슷한 수준이나 그 이상의 경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답변은 14.9%에 그쳤고, ‘노부모가 빈곤하지는 않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응답도 14.1%였다.
특히 여성 응답자의 경우 73.8%가 ‘부모 스스로 알아서 준비해야 한다’고 답해 남성(68.2%)보다 높았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녀의 부양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그만큼 자식들에게 덜 퍼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과거 자식들에게 몰아주고 외면받는 부모세대들을 보면서 불안을 느낀 50대가 본인들만의 생존전략을 세우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 교수는 “이 과정에서 부모·자식 간 갈등이 어느 정도 나타날 수 있지만, 서로에 대한 기대를 줄이고 자립을 준비하는 게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면서 “적정한 타협을 통한 ‘부모·자식 간 관계 리모델링’은 갈수록 더욱 심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