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한데, 이런 자질들은 제철이 되어야만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늙음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2000년 전 로마의 정치가가 위엄을 넘어 원숙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상찬한 노년은 한국에선 가난과 고독으로 신음하고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주역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내려온 그들을 기다리는 건 고장 난 육신과 텅 빈 손이다.
■건설사 간부서 일용직으로…82세 김병국씨 이야기
김병국씨(82)가 사는 공간은 월세 25만원짜리 서울 은평구 녹번동 고시원 방 한 칸이 전부다. 3.3㎡가 약간 넘는 방은 1인용 침대가 절반, 간이의자가 나머지 절반을 차지한다. 다리를 뻗고 자려면 테이블 아래로 정강이를 밀어 넣어야 한다. 하루 두 끼 식사는 고시원 주방에서 해결한다. 인심이 박하지 않은 고시원 주인이 냉장고에 김치와 깻잎무침, 콩자반, 피클 정도는 채워놓는다. 생선이나 육류를 구경하는 것은 일주일에 한두 번 독거노인 돌봄센터에서 가져다 줄 때뿐이다.
김씨는 은평구 공공근로 일을 해서 월평균 15만원을 번다. 노령연금 20만원을 합해 35만원이 월수입의 전부다. 8년 사는 동안 고시원비는 단 한번도 밀리지 않았다. 그는 “나쁜 짓 하고 꼬부랑 잠 자는 것보다 가난해도 떳떳하게 발 뻗고 자는 게 낫다”고 했다. 고시원비를 제하면 10만원이 손에 남는다. ‘생존’만 남은 삶이다.
공공근로와 기초노령연금에 기대 살아가는 김병국씨가 지난달 29일 오전 홀로 거주하고 있는 서울 은평구 녹번동 고시원 방에서 TV를 시청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평안북도 용천 땅 대지주였던 김씨 부모는 해방 이후 북한에 숙청 바람이 불자 열다섯살의 김씨를 서울로 내려보냈다. 살길이 막막했던 김씨는 서울 종로 방산시장에서 미군 물건을 떼다 팔았다. 기술이 있어야 먹고살 것이라는 생각에 낮에는 공업고등학교에 다녔다.
종전 후에는 대학에 진학해 전기공학을 배웠다. 방학이면 빨랫비누를 상자에 넣어 지방으로 도붓장사를 다니며 학비를 벌었다. 결혼하고 처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강원도 정선 나전탄광에서 전기기사로 일했다. 1964년에는 베트남에도 갔다. 항구도시 다낭은 최전선은 아니었지만 학생 데모와 종교 다툼으로 불안이 늘 따랐다. 전기기사로 일하고 받은 월급은 720달러. 요즘 돈으로 600만원이 넘는 돈 대부분을 한국으로 꼬박 2년간 부쳤다. 김씨가 귀국했을 때 가족은 서울 독산동의 방 3개짜리 적산가옥에 안착해 있었다.
중·장년 시절 김씨의 가정은 안온했다. ‘생존’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만 같았다. 김씨는 건설현장을 돌며 전기기사와 건축기사로 일했다. 3년여 단위로 회사를 옮길 때마다 월급이 뛰었다. 직급도 기사, 현장소장, 건설본부장 순으로 차차 올랐다. 마지막 회사에서 김씨의 직급은 건설담당 이사였다. “살림살이가 최소한 상위 10% 정도는 됐을 것”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떳떳함’은 김씨의 덕목이다. 그 덕분에 모자라진 않아도 크게 남기지는 못했다.
4남1녀를 모두 남부럽지 않게 공부시키고 결혼해 내보냈다. 큰 교통사고를 당하고 장애를 얻은 아내는 딸이 맡아 돌보기로 했다. 2002년 퇴직한 김씨에게는 집 한 채와 예금을 합해 수억원 정도가 남았다. 대단한 부를 새삼 일구겠다는 허황된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수중에 있는 돈을 남은 삶을 위해 까먹다가 가는 건 어쩐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60대 중반에 불과한 나이에 여생을 아무런 소속감도 없이 보내는 것도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김씨는 비슷한 처지의 퇴직 회사원, 퇴역군인과 함께 학원을 차렸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의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자영업자는 10년 내에 75%가 휴업이나 폐업했다. 김씨는 다수 쪽이었다. 가진 재산을 모두 털어 넣었을 시점에 김씨는 사업에서 손을 뗐다. 빚을 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일흔 무렵에 김씨의 삶에서 ‘생존’이 다시 중요한 문제로 되돌아왔다. 전직 건설담당 이사는 일용직으로 건설현장을 전전했다. 흘러 흘러 인천 남동공단 근처 찜질방 보일러실 관리인으로 일하던 김씨는 찜질방 매점을 하던 사회복지사의 가게보증금을 돌려받아 준 인연으로 8년 전 녹번동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자식들은 모두 번듯한 직장인이다. 늙은 부모를 자식이 봉양한다는 낡은 생활문화에 슬며시 기댈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돌보겠다고 나서는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직 김씨는 녹번동 좁은 방에서 매달 ‘생존’을 떠올리며 버틴다. “자식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은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을 겁니다. 사지가 멀쩡할 때까지는 나 스스로 벌어먹는 대신 거동이 어려워지면 요양병원비를 4형제가 나눠 내기로 며느리들과 약속했어요.” 김씨가 말했다. 김씨는 ‘노년의 삶’을 자식이 아니라 정부와 사회가 함께 책임질 문제로 본다. “노인이 일자리를 마련해서 두 발로 걷도록 해주든지, 젊었을 때 복지기금을 축적해서 늙어서 연금생활을 하게 해주든지 둘 중 하나는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세대 노인에게는 둘 다 없는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