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살고 있는 정모(72)씨는 3년 전 부인과 사별한 후 오직 담배만을 벗삼아 살고 있다. 맏아들 내외와 큰 손자가 살고 있는 102㎡(30평) 아파트의 구석진 10㎡(3평) 방이 유일한 그의 공간이다. 그는 그 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담배를 피운다. 며느리가 밥을 방으로 가져올 때를 제외하곤 가족과의 대화가 끊긴 지 오래다. 노환으로 심장과 폐가 심상치 않은 그는 그저 "병들어서 자식들한테 신세지기 전에 죽어야지. 병들면 잘 돌봐주기나 하겠어"라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다.
노인들이 점점 가족과 단절되고 있다. 정씨처럼 장성한 자녀와 같이 살지만 보살핌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는 가족 내 외톨이 노인들도 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병든 노후마저도 가족에 의탁하길 꺼린다. 대부분 가족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다.
8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65세 이상 노인 806명 대상 인권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건강 상태가 나빠졌을 경우 어디에서 지내고 싶느냐"는 질문에 대해 262명(32.4%)이 ''집보다는 노인요양시설에서 살고 싶다''고 답했다. 이 조사는 지난해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박경숙 사회학과 교수)에 의뢰해 이뤄졌다.
홀로 5남매를 키운 이모(85ㆍ광주 방림동)씨는 실태조사에서 "집에 한번 가면 딴 사람 보듯이 귀찮아하는 게 자식들"이라며 "애들 싸우는 꼴도 더 보기 싫고, 늦기 전에 요양원이라도 갈 생각"이라고 푸념했다. 이씨는 최근 서울에 있는 큰아들 집에 있다가 도망치듯 막내아들네로 들어갔지만 막내며느리와도 사이가 좋지 않다.
요양보호사, 간병인 등 외부 도움을 받으며 살고 싶다고 대답한 187명(23.1%)을 포함한다면 노인 10명 중 5명이 병든 노후를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돌봐주길 원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응답자 중 579명(71.8%)이 3개월 이상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상태다.
병든 노후를 다른 곳에서 보내기를 원하는 이유로 응답 노인 중 502명(54.8%)이 ''나를 돌보는 문제로 인해 가족간 갈등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가족에 피해를 주기 싫은 마음과 달리 노인들의 경제력이 열악해 독립하기도 쉽지 않다. 자녀 양육과 교육에 평생을 바치느라 노후에 빈손인 노인들이 태반이다. 실제 이번 설문조사에 참여한 65세 이상 노인들의 평균 소득은 월 62만원에 불과했다. 생활비의 절반 가까이(46%)를 이 소득으로 충당하고 있으며, 38%는 자녀 혹은 자녀의 배우자가 대주는 돈이다.
박경숙 교수는 "우리사회의 노인들이 노년기에 가족의 돌봄에 대한 적극적인 권리의식을 갖기보다는 자신을 ''짐''이라는 부정적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며 "일단은 노인들의 소득 안정을 위한 국가의 정책적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