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동안 시어머니를 모셔온 양계월씨<左>. 친엄마처럼 생각하고 의지하고 살았다. 그랬던 시어머니가 5년 전 치매에 걸렸다. 인생의 기억도,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의미도 지워졌다. 치매라는 지우개가 지나간 자리엔 투정과 억지가 대신 자리를 잡았고 양씨는 그걸 담담하게 받아 넘긴다. 아기처럼 돌보며 그저 웃고 또 웃는다. [사진=변선구 기자]
#주부 양계월(48·서울 신림9동)씨의 시어머니(90)는 치매 환자다. 양씨는 올해 초부터 23년간 모셔온 시어머니를 남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양씨는 시어머니를 볼 때마다 ‘남이다, 남에게 자원봉사 하는 거다’고 다짐한다. 시어머니는 양씨가 남편과 결혼 인사를 갔을 때 ‘나랑 살자’고 할 정도로 막내 며느리인 양씨에 대해 애정이 각별했다. 5년 전 치매가 찾아온 뒤 시어머니는 다른 사람이 됐다. 가족을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반지를 숨겨두고 찾아 내라고 며느리에게 호통을 치곤 했다. 쓰레기통에 볼일을 보는 건 예사였다. 볼일을 보고 이불로 닦기도 했다. 양씨는 “어머니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사랑했던 며느리에게 어떻게 이렇게 대할 수 있나’ 하는 원망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며 “차라리 남이라는 생각으로 모시니까 마음이 편해지고 더 잘 모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아파트에서 전기·토목 기사로 일하던 이재희(60)씨는 50여 일 전 출근길에 쓰러졌다. 일어나려는데 어찌 된 일인지 손가락 하나도 펼 수 없었다. 병원에 실려간 그는 뇌졸중(중풍) 진단을 받고 수술도 받았지만 왼쪽 팔과 다리를 쓸 수 없게 됐다. 아파트 청소 일을 했던 아내 최영희(60)씨는 남편 간병을 위해 일을 그만둬야 했다. 맞벌이를 했던 부부는 일순간 소득이 없어져 버렸다. 최씨는 “예전에는 암이 제일 무서운 줄 알고 암보험에만 들었다”며 “이제 보니 암보다 중풍이 더 무섭다”고 말했다.
고령인구가 늘어나면서 노인성 질병인 치매·중풍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다. 길게는 수십 년간 부양해야 하는 질병인 치매·중풍의 증가로 환자와 가족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25일 보건복지가족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국내의 치매·중풍 환자는 100여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가족(4인 가족 기준)까지 고려하면 500여만 명(한국인 10명 중 1명)이 치매·중풍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는 치매 환자는 2003년 6만여 명에서 지난해 14만여 명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중풍 환자는 45만여 명에서 63만여 명으로 50%가량 늘었다. 치매 환자 중 상당수는 노망이라며 치료를 받지 않는다. 복지부는 이런 환자를 포함하면 40만 명이 치매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치매는 환자 본인이 황폐해지는 것은 물론 가족까지 깊은 고통의 늪에 빠뜨린다. 본지가 19~23일 치매가족협회·치매센터와 함께 치매가족 13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절반 이상(53%)이 치매 환자를 부양하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응답했다. 10명 중 6명이 치매 환자를 부양한 다음 주부양자가 우울증 등과 같은 질병에 걸렸다고 답변했다. 이성희 한국치매가족협회 회장은 “치매나 중풍환자 가족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가정이 깨지는 경우도 흔하다”고 말했다.
치매와 중풍으로 인한 고통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수반한다. 건보공단은 치매 환자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3조4000억~7조3000억원으로 추정했다. 중풍환자 치료비(1조원)까지 감안하면 10조원에 육박한다.
일본 릿쿄대 하시모토 마사아키(橋本正明·복지학) 교수는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일본에서는 다양한 수발 서비스가 기존의 저소득층을 넘어 65세 이상 노인에게 광범위하게 제공돼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며 “고령화율이 일본처럼 높아지고 있는 한국에서도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김창규·김은하·백일현·박수련·장주영·김진경 기자, 고종관 건강전문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편집=안충기·이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