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박성민(가명.49) 씨는 요즘 회사 퇴직 후 어떻게 살지 걱정이 태산이다. 회사 정년을 6년 남겨두고 있긴 하나 조기 퇴직한 회사 선배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정년을 다 채울 생각을 버린 지 오래다.
현재 살고 있는 서울 강북의 31평짜리 아파트는 시가로 3억5천만원 정도. 퇴직금은 아파트를 살 때 얻었던 대출금을 갚느라 5년 전 중간 정산한 상태다. 결혼이 다소 늦어 아들과 딸이 고1, 중2인 박씨는 앞으로 들어갈 두 자녀의 대학 교육비만 생각해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자녀 결혼비용 등을 감안해 앞으로 더 절약해서 퇴직 전까지 2억원을 모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언제 조기 퇴직의 칼바람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간혹 밤잠을 설칠 때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퇴직후 생계에 대한 불안감은 가시지 않는다. 박씨 부부에게 여유롭게 노후를 즐기려면 10억원은 있어야 한다는 류의 노후 자금 추정은 먼 나라의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다.
◇ `은퇴후 30년''은 선택 아닌 필수 = 퇴직, 은퇴 후의 노후생활을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특히 아쉬운대로 노후생활을 보낼 수 있는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채 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의 노후 걱정은 클 수밖에 없다. 수명이 늘어나는 반면 조기 퇴직 등으로 일찍 직장에서 밀려나면서 소득없는 `노후 기간''도 길어져 그만큼 노후생계 부담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78.6세(남자 75.1세 여자 81.9세). 10년 전보다 평균 수명이 벌써 5년이나 늘어났다. 유아 사망이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평균 수명을 깎아 내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인의 수명은 80세를 훨씬 넘어섰다고 봐야 한다.
의료기술의 발달 등으로 이제 `80세 인생''을 넘어 `90세 인생''에 대비해 노후를 설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낯설지 않다. `은퇴 후 30년''은 이제 선택아닌 필수다. `평균수명 80세''를 놓고 보더라도 60세에 퇴직한다면 20년 간, 50세라면 30년 간을 부부가 소득없이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있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최근 노후빈곤이나 노후불안 문제가 사회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주된 배경으로 인구 고령화, 조기 퇴직 만연, 낮은 금리, 가족구조의 변화, 노인 일자리 부족 등을 꼽는다. 노년기에는 수명 연장에 대비하지 못해 노후자금을 소진해 생계가 막막해지거나, 물가상승으로 준비한 노후자금의 실질가치가 떨어지고 공적 연금 지급액이 연금 재정 악화 등으로 축소되는 경제적 위험 등에 노출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노후불안감 확산에 관한 가계의식 조사''(2004년 11월)를 토대로 조기퇴직과 청년실업으로 노후생계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우리사회의 고령화와 국민연금제도에 대한 불신감이 노후 불안감을 증폭, 가중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년은 62-65세가 정년인 교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업 등에서 55세 전후. 하지만 이마저도 경기침체로 인한 기업의 구조조정 상시화로 명예퇴직, 정리해고 등의 조기퇴직이 만연, 50-55세의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정년 자체의 의미가 갈수록 퇴색되고 있다.
◇ `퇴직금으로 노후생활''은 이미 옛말 = 노후문제 전문가들은 퇴직금과 자녀의 부모봉양이라는 노후대비의 전통적인 축이 무너지고 있는 데 주목하고 있다.
퇴직금의 경우 과거에는 `평생직장''에서 은퇴하면서 받은 퇴직금을 은행에 넣어두고 이자로 노후생활을 보내는 것이 그런대로 가능했지만 지금은 이러한 퇴직금의 노후보장 기능이 크게 줄어들었다. 저금리로 이자로 생활하는 시대가 끝났는 데다 기업들의 연봉제 도입과 퇴직금 중간 정산 등으로 자칫 잘못하면 퇴직금이 자녀 결혼 비용이나 몇년 내에 소진돼 버리는 `푼돈''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1억원을 정기예금으로 예치했을 경우 5%의 이자라면 한 달 이자는 이자소득세를 제할 경우 겨우 34만8천원 정도. 여기에 3% 내외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 금리는 거의 바닥 수준이다. 노후 준비가 부실해 어느 정도의 목돈도 없이 노후를 맞이했다가는 거리로 나앉기 십상인 상황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조사(2004년)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나이는 평균 54.1세. 1997년 IMF 경제위기 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퇴직하던 나이가 58-62세였던 것에 비하면 근로기간은 줄어들고 수명 증가로 소득없는 노년기는 길어졌다. 어느새 `60세 정년퇴직''이나 `평생직장'' 같은 이야기는 옛말이 됐고 심지어 퇴직 시점이 40대로까지 낮아지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가족구조의 변화도 노후대비의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핵가족화, 산업화로 가족부양 기능이 갈수록 약화돼 자녀에게 노후를 기대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 시간이 갈수록 자녀와 같이 사는 부모는 줄어드는 반면 자녀와 따로 사는 부모는 늘아나고 있는 추세다.
LG경제연구원 이철용 연구원은 "유럽 등의 인구구조는 서서히 바뀐 데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노후불안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한국의 40-50대는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면서 정작 자신들은 자식의 봉양을 받지 못하는 첫 세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인인구의 증가는 사회적, 국가적으로도 큰 부담이다. 선진국의 경우 늘어나는 연금이나 노인 의료비를 감당하느라 머리를 짜내고 있다. 미래학자들의 우려처럼 급속한 고령화, 다시 말해 오래 산다는 것이 사회의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노후대책 전문가 김동선 씨는 "생산활동을 중단한 노인들은 사회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면서 실제 스웨덴 등에서는 75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고가의 신장투석술을 의보 적용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
통계청의 2006년 가계자산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가구당 평균 총자산은 2억8천112만원. 여기서 가구당 부채를 뺀 순자산은 2억4천164만원이다. 그런데 총자산의 76.8%인 2억1천604만원이 부동산 자산이고 금융자산(저축, 전월세 보증금)은 20.4%인 5천745만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소득 상위 10%의 부자들이 전체 가구 순자산의 절반이 넘는 51.9%를 보유, 계층간 자산 불균형이 극심하다. 이 때문에 중간 소득 계층의 총자산은 2억188만원(부동산 1억4천957만원. 저축총액 4천679만원)으로 뚝 떨어진다. 소득이 하위 20%인 계층의 총자산은 1억2천996만원.
이 조사대로라면 보통의 한국인은 1억5천만원 내외의 집이나 아파트 한 채와 5천만원 정도의 저축을 갖고 20-30년간의 노후를 맞이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산마저도 고령으로 접어들수록 줄어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구당 총자산은 가구주 연령이 50대를 정점으로 60대 이상 계층부터는 떨어졌고 특히 노인가구(65세 이상 가구원만 있거나, 65세 이상 가구원과 18세 미만 미혼 자녀나 손자녀가 함께 사는 가구)의 평균 총자산은 일반가구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1억3천330만원에 불과하다. 평균수명이 증가하면서 가시화하고 있는 `노후빈곤''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해야 할 이유다.
<2007년 3월 9일 / 연합뉴스>
일자리를 갖고 있고, 한 살이라도 젊을때, 몸이 좀이라도 건강할 때, 20~30년이상이 될 노후준비를 해 두지 않으면, IMF보다 더, 아니 60~70년대에 겪었던 보릿고개보다 더 무섭고 추운 경제한파가 개인 각자에게 불어 닥칠지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해 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